[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미군의 굴욕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1950년에 한국이란 나라를 아는 세계인은 드물었다. 심지어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8군 중에서도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아는 이가 드물었다. 그런 이름 모를 나라의 군대에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군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최초의 교전이었던 스미스 특임대의 죽미령 전투에서부터 평택 전투, 천안 전투, 금강 방어전, 대전 방어전까지 이틀을 버틴 전투가 없다시피 했다.
소련제 전차와 빈약한 대전차무기, 병력 차이 등등 여러 가지 미군이 불리했던 사정을 감안해 준다고 하더라도 전투 양상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전투야 패배할 수도 있지만, 방어선이 한번 무너지면 병사들은 무기는 고사하고, 몸에 걸친 모든 장비를 버리고 도주했다. 금강 방어선에서 미군 중대들은 남아 있는 통신기가 없어서 협력 방어가 되질 않았다. 반면 북한군은 일개 사단을 무장시킬 무기와 장비를 거저 얻었다.
미군의 지휘관과 장교, 고참 하사관 중에는 2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이 많았다. 이들의 평판과 경력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대전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비운의 딘 소장은 유럽 전선에서 연대장을 거쳐 사단장이 된 인물이었다. 유능하면서도 상당히 터프하고 저돌적인 지휘관이었다. 월튼 워커 장군은 딘 소장을 "여건만 된다면 아무리 어려운 임무라도 수행해 내고야 마는 친구"라고 평가했었다.
그러나 이들도 소용이 없었다. 금강 전투에서 미군 포병대가 기습을 받았다. 포병은 설사 후퇴하더라고 포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대대장은 참호에 뛰어들어 사격을 시작했다. 이를 본 상병 한 명이 대대장 옆으로 달려와 같이 싸웠다. 그런데 이 상병이 전부였다. 다른 병사들은 모조리 달아났다. 대대장과 상병은 함께 전사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용감히 싸웠던 병사, 군인다운 모습을 보였던 병사는 10%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북한군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일까? 북한군도 결코 A급 군대는 아니었다. 게릴라전이나 팔로군에서 전투 경험을 닦은 지휘관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현대전 경험은 미군 장교들의 경험에 비하면 변방의 경험이었다. 병사들 중에 팔로군 출신들이 20% 정도 되었지만, 실전부대로서 진짜 전투를 겪었던 병사들은 그 비율이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병사들의 전투 경험은 6월 한 달의 전투 경험이 전부였다. 그리고 소련 군사고문단의 평가에 의하면 북한군의 전술 숙지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기본은 하지만 응용력은 약했다. 전투기 조종사의 실력을 비유로 들자면, 기본적인 조종술, 공격 능력을 갖추었지만, 고급 선회기술이나 어려운 조종은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직후에 국군의 대비상태가 치명적으로 좋지 않았기에 그들은 상당히 놀라운 전과를 보였다. 하지만 그 형편없는 국군이 남부까지 밀리는 동안 북한군 전력의 40% 가까이 소모시켰다. 덕분에 미군의 전투실력은 더더욱 수치스러운 수준이 되고 말았지만, 북한군이 너무 강했다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미군이 이토록 형편없는 군대로 변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군은 보통 도로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한다. 강을 방어할 때도 교량과 도로를 가운데에 두고 병력을 배치한다.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은 도로 양쪽에 불쑥 솟아서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낙타 등 모양의 지형을 쉽게 제공해 준다. 양쪽 언덕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뒤에 박격포를 두고, 후방에 포병을 배치한다.
훌륭한 방어선처럼 보이지만, 북한군은 도로로 일부 병력을 보내 미군의 시선을 고착하고, 산악지형을 이용해서 우회한다. 미군 방어선의 뒤로 돌아 들어가기도 하고, 양쪽에서 공격하다가 한쪽을 허문다.
예를 들어 방어선의 한쪽 끝이 허물어진다면 방어선을 포기하더라도 체계적인 후퇴를 할 수 있다. 접전지역의 소대가 후퇴하는 동안, 옆에 있는 소대가 엄호하고, 번갈아 엄호하면서 빠져나온다. 그렇게 소대가 후퇴하고 중대가 후퇴한다.
7월의 전투에서 미군은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한번 구멍이 나면 소대, 중대가 썰물처럼 무너졌다. 간혹 용감하게 자리를 지키던 소대는 순식간에 고립되어서 전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기를 손에 들고 있는 병사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언덕에서 내려와 도로를 따라 후퇴하다 보면 도로가 차단되어 있고, 도로 양쪽 언덕에서 총알과 박격포가 날아 온다. 병사들은 차량과 무기를 버리고 들판으로 도주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관총 소사가 시작되고, 박격포가 사방에서 작렬한다. 명중률이 낮아도 공황을 일으키기에는 족하다. 개활지에서 표적이 되었는데, 대부분 논인 들판은 진흙뻘 같아 발은 푹푹 빠지고 뽑기가 힘들다.
병사들은 군화를 벗어 버리고 맨발로 달아난다. 이때쯤 들판이 아니라 산으로 달아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방향을 바꾼다. 약은 병사들 일부는 이미 산으로 튀었다.
7월의 날씨는 무덥고, 한국의 산은 가파르다. 숨이 턱턱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리면 병사들은 소총, 무전기, 철모, 탄띠, 수통까지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기어오른다. 부대 절반이 죽거나 포로가 되고, 절반은 사기도 무기도, 투지도 모두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탈출한다.
북한군은 산을 거점으로 점의 전투를 했고, 미군은 도로를 따라 직선의 전투를 했다고 표현했다. 도로가 차단되면 도주하고,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 전에 양측의 감제고지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 비탈만 보이면 회피하고, 장교가 강제로 비탈로 오르라고 하면 오르기도 전에 체력이 고갈되고 쓰러져서 전투력을 상실했다.
과거에는 이 원인을 미군은 다리가 길어서 산을 잘 오르지 못하고, 한국인은 다리가 짧아서 산을 잘 탔다고 설명한 글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다리의 길이는 산을 오르는 능력과 상관이 없다.
첫 번째 이유는 훈련과 체력 부족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미군은 세상 편한 생활을 했다. 전술 능력은 차치하고 기본 체력이 되지 않았다. 나중 일이지만 다리가 길든 짧든 제대로 단련된 정예부대는 산과 비탈을 가리지 않았다.
전술적으로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전투는 팀플레이이다. 팀플레이를 하려면 기본적인 요건과 편제를 갖추어야 한다. 일례로 야구 시합에서 양측 선수들의 역량이 비슷하다고 해도 한 팀이 2루수와 유격수 없이 싸운다면 그들의 전력은 20%가 아니라 90% 이하가 될 것이다.
주일 미군은 2차 대전 후 미군의 대대적인 전력감축 계획에 따라 1개 연대가 2개 대대 편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의 편제 원리에서 3개 소대 이상이 중대가 되고 3개 중대 이상이 대대가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개 연대가 방어전을 한다고 할 때 2개 대대를 좌우에 배치하면 1개 대대는 후방 예비대로 두어야 한다. 방어선에 구멍이 났을 때 예비대를 투입하면 침투한 적을 삼면에서 포위해서 역공할 수도 있다. 이 역공이 성공하면 적이 들어온 길로 나가 역습도 가능하다. 예비대가 없다면 이런 다이내믹한 전투를 벌일 수가 없다. 한군데만 구멍이 나도, 한 병사만 도주해도 구멍이 생기고 확장되면서 전선 전체가 무너진다.
산과 협곡이 많은 한국의 지형은 우회, 은밀히 기동을 통해 방어선을 절단하거나 침투하기가 대단히 용이하다. 한국전쟁 내내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런 침투 전술로 유엔군을 괴롭혔다. 예비대를 갖추고 병력이 충분해도 이런 전투에 고전을 해야 했는데, 예비대도 없이 싸워야 했던 이 시기의 전투에서 미군이 형편없이 무너져야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 미군 소령은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짚이 뒤집혔다. 짚 뒤에 고립되어 있는데, 이 광경을 본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2차 대전 참전 경험이 있었던 그 소령은 사병들의 행동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부대, 자신과 생활하던 병사들이었다.
참전 병사들은 다 제대하고 완전히 신병으로 물갈이가 됐음에도 미군 장교들이 이들이 이전의 병사들과 같으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군인정신, 군인 행동은 민족성이나 사회, 유전과 같은 이유로 형성되지 않는다. 유럽에 투입된 병사들은 비록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이지만 자신들의 전쟁이란 의식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세계인의 자유, 평화를 지키고,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한다는 거대한 명분은 있었지만, 병사들은 이를 실감하지 못했다. 즉 개개인의 병사들이 체감하고 공감하는 명분이 없었다.
전술, 무기뿐 아니라 정신과 의지에서도 미군 병사들은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장교들은 단 5년의 세월 동안 병사들이 이렇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전쟁에 대해서도 낭만적이거나 감정적인 생각이 확산돼 가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군은 이런 점에서 위축되고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를 군에만 요구해서도 안 된다. 국민의 의지와 인식,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것은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생존과 기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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